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소련 국경분쟁 (문단 편집) === 국제적 배경 === 1858년 5월 16일,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이 [[아무르 강]] 이남과 [[우수리강|우수리 강]] 이동 그리고 아무르 강 이북에 대한 국경 및 관할에 대해 체결한 불평등조약인 [[아이훈 조약]]과 청나라가 1860년 10월 18일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 러시아 제국 3개국과 개별적으로 맺은 [[베이징 조약]]으로 중국은 러시아에 [[외만주]]를 빼앗긴 후로 동해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1953년 3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뇌병변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소련에서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권좌에 올라 대대적인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였다. 스탈린에 대해 불만은 많았지만 높이 평가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크게 놀라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로 비난하게 되었다.[* 중국의 비난은 심지어 베이징의 소련 대사관 근처의 거리 이름을 '수정주의로'라고 바꿔서 소련을 비웃을 정도. [[이원복]] <[[현대문명진단]]> 출전. 심지어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와 소련에 대해 사회제국주의(Social Imperism)라는 비난까지 했었다.] 거기에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흐루쇼프를 나약한 인물로 얕잡아보았던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에게 지속적으로 모욕적인 행동을 계속하였으며 핵무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계속 하여 핵전쟁을 방지하려는 흐루쇼프의 계획에 훼방을 놓았다. 1958년 [[진먼 포격전]]도 중국의 큰형 노릇을 하려는 흐루쇼프를 물먹이려는 마오쩌둥의 고도의 계산이었다. 여기에 사회주의의 2인자였던 중국은 더 이상 소련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이 소련을 대체하려는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과시하려 하여 소련 지도부를 분노케 했다. 이리하여 양국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고 [[대약진 운동]] 절정기에 소련이 모든 기술고문 등을 철수시키면서 [[중소결렬]]이 일어났다. 이렇게 양국의 동맹관계는 청산되었다. 1963년, 소련 공산당은 <소련 각급 당 조직과 전체 공산당원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을 발표, 마오쩌둥이 착오적이고 치명적인 정책을 벌여 사회주의 국가간 상호관계의 원칙을 위배했다고 맹비난했고 중국도 이에 맞서 소련은 [[미국]], [[인도]], [[유고슬라비아]]와 힘을 합쳐 사회주의 중국과 모든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에 대항하여 수치스러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고 공격해댔다. 1963년에서 1964년에 걸쳐 양측간의 비난이 오갔고 중국은 소련에 대한 공격 카드로 소련이 '극동 지역과 다른 인근 지역'을 빼앗아갔다고 맹비난했다. 중국의 국력이 약화될 대로 약화된 청 말기 시절 만주 및 조선 등 동아시아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던 러시아가 기회를 엿보다가 아편전쟁 중재를 빌미로 불평등 조약을 맺어 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연해주 지역(현재의 러시아 극동지방. 블라디보스톡 등)이기 때문에 중국과 소련은 국경분쟁의 씨앗을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것. 흐루쇼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 사이에서 일어난 약간의 오해는 우수리 강과 접경지대의 하천에 관련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하천은 세월에 따라 물줄기가 달라지고 때로 새로운 섬이 생겨나기도 한다. 중국과 [[러시아 제국|이전 차르 정부]]가 체결한 조약에 따라 국제법상 통상적인 강물의 중간이 아니라[* 국재법에서는 관습적으로 국경을 형성하는 국경 하천의 경우 항행이 가능한 수로일 경우 항행이 안전한 수로의 중앙선을 국경 경계선으로 하며(일명 Thalweg principle), 항행이 불가한 수로일 경우 강의 중앙을 경계선으로 하여 내수를 구성한다. 이는 최소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확인되는 국제관습법이다. 물론 예외는 있어서, 그 예로 북한과 중국의 경우 특이하게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로 중앙선이 아닌 강 그 전체를 국경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 측 강변을 경계로 삼았다. 따라서 만약 새로운 섬이 생겨난다면 러시아 영토에 속하는 것이 당연했다. (...) 나중에 상황이 더욱 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1962년, 중소 양국은 1964년 2월에 국경문제에 관련된 비밀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중국 측이 수로 문제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와 극동에 영토를 확장했던 문제를 새로 논의하자고 주장하자 흐루쇼프는 1962년 10월, 국경문제 협상 합의를 파기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주도로 실각한 후 새로 권좌에 오른 브레즈네프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모스크바를 방문한 [[저우언라이]]에게 만취한 국방장관 [[로디온 말리놉스키]]가 우리가 흐루쇼프를 쫓아냈듯이 당신들도 '낡은 덧신'인 마오쩌둥을 쫓아내라고 요구하면서 화해 가능성은 박살이 나버렸다. 저우언라이는 격노하여 연회장에서 퇴장해버렸고 다음날 브레즈네프가 직접 저우언라이를 찾아가서 사과했으나 저우언라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선을 그어버렸고 자존심 상한 브레즈네프도 마오쩌둥과의 정상회담을 거부하면서 양국의 화해 가능성은 틀어졌다. 1965년 2월,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이 베이징을 방문하였으나 마오쩌둥과 류사오치는 코시긴에게 흐루쇼프가 과거 중국에 저질렀던 일을 마구 비난하며 앞으로 "소련과 계속 논쟁할 것."이라고 못을 박으면서 예전의 우호 관계로 돌아갈 생각도, 소련의 종주권을 따를 생각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 마오쩌둥은 소련이 극동 영토의 중국 소유권을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중소 국경지대에서 도발을 감행할 것을 지시했다. 1964년 10월부터 1969년 3월까지 총 4189건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는 1960년에서 1964년 사이에 일어난 충돌에 비하여 1.5배나 많은 횟수였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고 진압 이후에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에 계속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한 소련은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한 사회주의 국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들이 개입할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고 중국에서는 이를 두고 사회적 제국주의라고 맹비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